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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송 사진집 "결정적 순간" 서문.

by 선배/마루토스 2013.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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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브레쏭 사진집 “결정적인 순간”의 서문

사진집 “결정적인 순간” (1952년판)의 서문은 본래 불어판 사진문고에는 게재되어 있지 않았으나,
까르띠에-브레쏭이 자신의 사진에 대한 생각과 결정적인 순간의 미학에 관하여 언급한 유일한 글로서,
그의 사진세계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 사진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므로 이 책에 수록한다.

“이 세상에 결정적 순간을 갖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카르디날 드 레츠.

다른 많은 소년들처럼 나도 브로니형 암상자 사진기로 사진세계에 입문하였다.

그 사진기를 이용하여 나는 휴일날 스냅사진들을 찍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여 프랑스의 국민학교 학생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목요일과 일요일에 그림을 그렸다.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점차 카메라를 다루는 여러가지 방법들을 알아내는 데 전념하였다.

어쨌든 내가 카메라를 사용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휴일날의 스냅사진이나 친구들의 볼 품 없는 사진을 찍는 것에는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진지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의 냄새를 뒤쫓아 그것의 냄새를 맡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때 거기에 영화가 있었다.

몇몇 훌륭한 영화들을 통해 나는 보고 관찰하는 법을 배웠다.

펄 화이트 Pearl White 의 <뉴욕의 미스테리>,D.W.그리피드Griffith의 걸작 <낙화>,

스트로하임 Stroheim의 처녀작인 <탐욕>, 에이젠슈타인 Eisenstien의 <전함포템킨>,

드라이어 Drayer의 <잔다르크>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준 것들이다.

얼마 후 나는 앗제 Atget의 사진을 몇 장 갖고 있던 사진작가를 만났다.

그 사진을 멋지다고 생각한 나는 삼각대와 뒤집어쓸 검은 보자기,

그리고 윤기흐르는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3 X 4 인치의 카메라를 한 대 구입했다.

그 카메라는 셔터 대신에 렌즈캡이 부착되어 있어서 노출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벗겼다가 다시 씌워야 했다.

그 점 때문에 나의 도전은 말할 것도 없이 정물의 세계로 한정되었었다.

다른 사진용 주제들은 나에겐 지나치게 복잡하거나,그렇지 않으면 ‘아마츄어적 소재’로 보였다.

그리고 이 당시까지 나는 그런 것들을 무시함으로써 그야말로 순수예술에 나 자신을 바치고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었다.

다음으로 나는 내 세면장 안에서 나만의 순수예술을 현상하는 데 몰두하였다.

사진의 만물박사가 된다는 아주 흥미진진한 일을 찾아낸 셈이었다.

나는 인화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또 어떤 종류의 종이가 부드러운 영상을 만들어내고

다른 어떤 종류의 종이가 그와 반대되는 효과를 만들어내는가 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지식조차도 없었다.

종이 위에 영상이 원했던 바대로 나오지 않아서 늘 미칠 지경이 되곤 했어도 나는 그런 지식 따위에는 신경을 쏟지 않았다.


스물두 살이 되던 해인 1931년에 나는 아프리카로 갔다.

코트디브와르에서 나는 내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결코 보지 못한 종류의 소형 카메라를 한 대 샀다.

그것은 프랑스 회사인 크로스사 제품이었는데, 거기에는 톱니바퀴 구멍이 없는 35밀리 필름 크기만한 사이즈의 필름이 사용되었다.

그 한 해 동안 나는 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 사진들을 프랑스에 돌아온 후에야 현상했다.

그 해의 대부분을 밀림 속에서 고립된 채로 지냈던 탓에 그 이전에는 현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필름에 습기가 스며든 나머지 그 사진들은 모두가 거대한 양치식물 모양으로 겹쳐진 이상한 형상이 되어있었다.

아프리카에서 흑수열 黑水熱을 앓았던 나는 그 무렵 건강이 다시 회복된 것에 감사했다. 나는 마르세이유로 갔다.


얼마 되지는 않으나 수당 덕분에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고,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일을 했다.

바로 그때 나는 라이카 카메라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 눈의 연장 延長이 되어 그것을 발견한 뒤로는 한시도 곁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나는 삶을 ‘포착’하겠다고, 즉 살아가는 행위 속에서의 삶을 간직하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숨막히는 듯한 느낌을 맛보며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는 채비를 갖추고 온종일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 눈 앞에서 저절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상황의 진수 모두를

단 한 장의 사진의 테두리 속에 잡아둘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르포사진을 만들겠다는 생각, 다시 말하자면 일련의 사진을 통해 이야기를 하겠다는 생각은 그 당시 나의 뇌리에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동료작가의 작업과 사진잡지들을 살펴본 후 뒤늦게야 나는 르포사진을 좀더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많은 여행을 했다. 그러나 아직도 여행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는 정말 알지 못한다.

한나라와 그 다음 나라 사이에 내가 본 것을 소화하기 위한 시간적인 간격을 둠으로써,

나는 그 문제를 생각하기 위한 시간을 할애해 두고 싶다.

일단 새로운 나라에 도착하고 나면 나는 그 나라의 고유한 관습에 따라 살아보기 위해 그 곳에 정주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나는 절대로 계속해서 세계 일주를 하는 여행자가 될 수는 없다.



1947년 나까지 포함된 다섯명의 프리랜스 사진작가들은 ‘매그넘 포토’라는 합자회사를 창립했다.

이 회사는 여러 나라의 많은 잡지들에게 픽처스토리를 공급해 주고 있다.

내가 카메라의 파인더를 통해 바라보기 시작한 지도 25년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이제 딜레탕트는 아닐지라도 아직도 아마츄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픽처스토리


도대체 르포사진, 혹은 픽처스토리란 무엇인가? 때때로 그 구성이 너무 힘차고 포괄적이며,

또 그 내용의 호소력이 너무 강해서 그 한 장의 사진이 저절로 이야기의 전부가 되는 그런 특이한 사진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생기는 일은 드물다.

한 주제로부터 모두 함께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들은 대다수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흩어져 있다.

그것들을 강제로 모아두는 작업이 연출이고, 또 내가 느끼기에는 그것은 속이는 짓이다.

그런데 주제의 불꽃뿐만 아니라 그 ‘핵심’까지도 보여주는 사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면,

바로 그것이 픽처스토리인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진들에 걸쳐 산재해 있는 보충요소들을 재결합시키는 것을 지면이 해 준다.

픽처스토리는 머리와 눈과 마음의 합동작업을 필요로 한다.

이 합동작업의 목적은 펼쳐지고 있는 어느 사건의 내용을 묘사하고 그 인상을 전달하는 것이다.

때로는 단 하나의 사건이 그 자체로서, 그리고 그 국면이 너무 복잡할 때도 있어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의 해결방안을 찾느라고 그 사건의 주위를 배회해야 할 필요가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세상은 움직이고 있으므로 움직이는 것을 대하는 당신의 자세가 정태적 靜態的인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때로 사진을 찍는 데에는 수 초가 걸리기도 하고 혹은 몇 시간, 며칠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작업의 출발점을 이루는 규범적인 구상이나 패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머리와 눈과 마음을 항상 긴장시키고 있어야 하며, 또한 몸의 유연함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 매우 풍부한 소재를 제공해 준다고 해도,

사진작가는 아무것이나 다 해보고 싶은 유혹을 경계해야만 한다.

삶이라는, 있는 그대로의 소재를 재단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렇듯 자르고 또 잘라야 하지만 그러나 분별있게 잘라야 한다.

실제로 작업하는 동안 사진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 것인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간혹 어느 구체적인 상황이나 장면에 관한 가장 강렬한 것일 수 있을 그런 사진을 이미 찍었다는 느낌이

당신에게 생기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계속 사진을 찍어댄다.

그것은 그 상황과 장면이 정확히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미리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상황의 요소들이 다시 핵심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바로 그런 경우에서처럼 당신은 그 현장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아울러 기관총 사수가 총을 쏘아대듯 사진을 찍어댄다든가,

당신의 기억을 산만하게 하고 르포사진의 정확성을 온통 망쳐놓는

불필요한 자료들로 당신 자신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을 피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기억력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특히 그것은 장면 자체의 속도에 따라 질주하면서 당신이 찍은 모든 사진들을 재정리 하는 작업과 관련될 때 더욱 중요하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장면을 대하고 있는 동안 사진작가는 아무런 빈틈도 남겨놓지 않았으며,

정녕 그 장면의 의미에 대해 전체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표현을 부여했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차후에는 너무 늦기 때문이다. 결코 그는 실제 장면을 뒤로 돌려 처음부터 다시 찍을 수는 없을 터이다.


사진작가는 두가지 종류의 선택을 해야하는데, 그 둘은 모두 결국 후회를 낳고 말 수도 있는 것들이다.

하나는 파인더를 통해 대상을 바라볼 때 행하는 선택이며,다른 하나는 필름을 현상, 인화하고 난 다음에 하는 선택이다.


사진을 현상, 인화하고 난 다음에 당신은 그 사진들 모두가 제대로 된 것이라 해도 강렬하지 않은 것들을 가려서 분리해야 한다.

당신이 어디에서 실패했는지를 비로소 아주 분명하게 알게 된 때는 이미 늦은 때이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 당신은 실제로 사진을 찍는 동안에 품고 있었던 조바심을 간혹 상기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없음에서 비롯한 망설임의 느낌이었던가?

당신 자신과 전개되고 있던 사건 사이의 어떤 물리적인 간극 때문이었던가?

혹은 단지 전체적인 구성과 관련된 어떤 세부적 사실들을 고려하지 않았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가장 흔한 경우인데) 당신의 시선이 막연하여 눈이 정처를 잃고 있었던 때문인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 공간은 우리 자신의 눈으로부터 시작되어 펼쳐지면서 점점 무한대로 확장되어 나간다.

현재의 시점에서 공간은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느만큼의 충격을 주고나서 시간적으로 우리를 떠나 우리의 기억 속으로 유폐되어 그 속에서 변형된다.

모든 표현수단들 중에서 특정적이고 일시적인 순간을 영원히 고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사진이다.

우리 사진작가들은 끊임없이 사라져가는 것들을 취급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라지고 난 후 그것을 다시 되살려 놓을수 있는 장치는 이 지구상에 없다.

우리의 기억을 현상 인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글을 쓰는 작가에겐 심사숙고할 시간이 있다.

그는 받아들이고 거부했다가 또 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거듭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생각을 종이에 기록하기 이전에 여러가지 상관요소들을 한데 묶어 볼 수도 있다.

그의 머리가 ‘잊어’버리기까지에는 역시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며,또 잠재의식이 그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진작가들에게 있어 한번 가버린 것은 영원히 가버린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 직업의 고충과 위력이 비롯된다.

일단 호텔로 되돌아오면 우리는 이야기를 다시 되풀이할 수가 없다.

우리의 작업은 현실을 감지하여 거의 동시에 그것을 카메라라는 우리의 스케치북에 담는 일이다.

촬영하는 동안에 현실을 조작하려 해서는 안 되며, 또한 암실에서 그 결과를 조작하려 해서도 안된다.

이런 속임수들은 관찰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실히 드러난다.

픽처스토리를 만들 때에는 흡사 권투 심판과 마찬가지로 득점과 횟수를 계산해야 한다.

우리가 시도하는 픽처스토리가 어떤것이더라도 우리는 그 현장에 침입자로서 다가가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따라서 비록 대상이 정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발끝으로 살금살금 접근해 가야 한다.

비단 같은 부드러운 손길과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모두가 지녀야 될 것들이다.

밀어 젖히고 떼밀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실제의 자연광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실제의 빛이 조금도 없는 경우에조차도- 플래시 라이트의 도움으로는 어떤 사진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진작가가 이같은 조건들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그는 필경 무자비한 공격적 성격의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사진이라는 직업은 사진작가가 그가 사진에 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많이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관계, 그릇된 말이나 태도는 모든것을 망쳐 버릴수도 있다.


잘못해서 거북한 관계, 그릇된 말이나 태도는 모든것을 망쳐 버릴 수도 있다.

잘못해서 거북한 관계가 되면 그 사람은 카메라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피하고 만다.

모든 경우는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체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정된 범위 속에 있을 수 밖에 없긴 하지만 겸손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동양의 어느나라에서는 참을성 없는 사진작가는 -혹은 단순히 시간에 쫓기는 사진작가라 해도- 조롱거리가 되기 쉽다.

설혹 당신이 노출계를 끄집어내면서까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를 남들이 충분히 알 수 있게끔 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사진촬영에 대해서는 잠시 잊어버리고 아이들이 당신에게로 달려와

가시덩굴처럼 당신 무릎에 매달리는 것을 선선히 맞아들여 주는 일이다.




주제


우리의 개인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것에는 주제가 있다.

우리가 주제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것은 도처에 존대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명확히 알아야 하고,

또 우리가 느끼는 바에 대해 정직해야 된다.

주제란 여러가지 사실들의 수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은 거의 아무런 흥미도 제공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여러 사실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이해할 수 있고,

또 리얼리티를 전달해 주는 본질적인 사실을 더 잘 선택할 수 있다.

사진에 있어서는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훌륭한 주제가 될 수 있다.

사소하고 인간적인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라이트 모티프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세계를 보고 또 보여준다.

그러나 형식의 유기적인 리듬을 발생시키는 것은 하나의 사건 그 자체이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떤것의 본질을 추려내는 방법은 무수히 많지만,

그것을 일일이 열거하려 하지는 말고 신선한 채로 그냥 남겨두도록 하자.


회화가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는 하나의 분야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사진술의 발견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건간에 사진이 회화의 형식들 중에서 이 분야의 몫을 떠맡은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화가들에 의해서 몹시 천대받고 있는 한 가지 분야는 바로 초상화이다.

프록코트,군모,말, 이런것들은 요즈음에는 가장 전통을 중시하는 화가들 조차도 사양하는 것들이다.

그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초상화가들이 그린 그 많은 각반단추에 질색하곤 한다.

사진작가들의 경우에는 -아마도 우리가 화가들보다 가치에 있어 훨씬 더 지속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인 듯한데-

이런 것들은 화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흥미를 돋구어 준다.

우리는 모든 리얼리티를 통해 삶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초상화라는 수단에 의지하여 자신을 영원히 남기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가장 멋진 모습을 후손에게 넘겨 준다.

이런 욕구에는 악마의 요술에 대한 공포감일지도 모르는 어떤 느낌,

즉 카메라의 모델이 됨으로써 일종의 마술행위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는 느낌이 뒤섞여 있다.


인물사진에 있어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어느 한 사람의 신분을 추적해 불 수 있도록 해 주는 점이다.

인간의 연속성은 그를 구성하는 모든 외부적인 사실들로부터 온다.

그것이 설혹 가족사진첩에서 삼촌을 어린조카로 잘못 아는 것의 연장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만일 사진작가가 어느 개인의 세계, 내면적인 것 만큼이나 외면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는

개인의 세계에 대한 진정한 고찰을 획득하려고 한다면 인물사진의 대상을 그 개인의 평상적인 상황속에 놓는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물사진 속에는

개인의 삶의 환경 -인간에게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삶의 환경이란것이 있으므로- 을 담아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진찍히는 사람이 카메라나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복잡한 장비들과 반사판 그리고 다른 여러가지 기재들은 멋진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을 방해하기에 충분하다.




사람의 얼굴 표정보다도 더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달리 무엇이 있을까.

어느 특이한 얼굴에서 받은 첫인상은 대개 옳은 것이다.

그러나 사진작가는 언제나 그가 찍고자 하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서 첫인상을 실체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훌륭한 인물사진을 만드는 데 있어 결정적인 순간과 심리상태는 카메라의 위치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이다.

나로서는 한두 사람의 문예옹호자를 제외하고는

주문을 하고 돈을 지불하는 고객을 위한 인물사진작가가 되는 일은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 고객들은 아첨받기를 원하고, 따라서 그 결과는 이미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진작가가 추구하는 것은 찍히는 사람에 대한 면밀한 심리학적연구임에 반해,

찍히는 사람은 카메라의 객관성을 의심 하는 것이다.

한 사진작가가 찍은 모든 인물사진들에 어떤 동질성이 여실히 표출된다는 것은 또한 사실이다.

사진작가는 그의 모델의 아이덴티티를 탐색하면서 또한 그 자신의 표현을 완성시키려 노력한다.

진정한 인물사진은 용모의 수려함이나 추함을 강조하지 않고 다만 성격을 반영한다.

나는 꾸며진 인물사진들보다는 사진관의 진열장 속에 나란히 열지어 붙어 있는 작은 증명사진들을 훨씬 좋아한다.

그 얼굴들에는 적어도 어떤 문제, 단순히 실제적인 증명의 필요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그 무엇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시적인 동일화작업 대신에 찾고 있는 것이다.



구성


사진이 그 주제를 가장 밀도있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라면 형식의 관계도 엄격하게 수립되어져야 한다.

사진은 실재하는 사물들의 세계 속에 내재하는 리듬에 대한 인식을 다룬다.

눈이 하는 일은 잡다한 리얼리티 중에서 특별한 주제를 발견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또 카메라의 소임은 눈이 내린 결정을 단지 필름 위에 기록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회화에 대해 그런 것처럼, 사진에 대해서도 한번 흘깃 보는 것을 통해 그 전체를 모두 바라보고 지각한다.



한 장의 사진에 있어서 구성은 눈에 띈 요소들의 동시적 결합과 유기적 종합의 결과이다.

비록 기본적인 물질적 소재에 덧붙여지는 추인적 追認的 생각이 있기는 하지만,

형식과 내용은 서로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에 구성을 나중에 첨가시킬 수는 없다.

구성은 그 자체의 필연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사진에는 새로운 종류의 조형성이 있는데 그것은 대상의 움직임에 의해 생긴 순간적인 선들의 산물이다.

우리는 그 움직임이 흡사 삶 자체가 펼쳐지는 방식에 대한 예감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에 맞추어 작업한다.

그러나 움직임 속에는 움직이는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한 순간이 있다.

사진은 이 순간을 포착하여 그 순간의 균형을 부동의 상태로 고정시켜 두어야 한다.

사진작가의 눈은 끊임없이 평가를 내린다.

사진작가는 단지 그의 머리를 몇분의 일 밀리 정도 옮겨 보는 것을 통해 선의 일치를 가져올 수 있다.

또 무릎을 살짝 굽힘으로써 시야를 수정할 수도 있다.

카메라를 대상에 더 가까이, 혹은 더 멀리 둠으로써 그는 어느 세부를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 대상이 예속될 수도 있고, 또는 사진작가가 대상의 지배를 받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진작가는 대상에 반응하는 속도로 셔터를 누르는 데 소요되는,

거의 그만큼의 시간 동안에 한 장의 사진을 구성한다.

때로 당신에게는 무엇인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머뭇거리고 지체하는 경우가 생긴다.

때로는 사진을 만들기 위한 모든것이 여기 다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한다.

단 한 가지 빠진 듯한 것만 제외하고 말이다. 도대체 그 한 가지는 과연 무엇일까.

아마 문득 어떤 사람이 당신의 시야 속으로 걸어 들어올 것이다.

당신은 파인더를 통해 그가 나아가는 길을 뒤쫓는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당신은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당신은 정말로 무언가를 얻었다는 느낌을 갖고 (당신은 그 연유를 모르지만) 떠난다.

그 후 이 느낌을 실체화하기 위해 당신은 이 사진을 인화하고 그것에서 분석을 통해 나타나는 기하학적 도형을 추적한다.

그리고는 만약 셔터가 결정적인 순간에 눌려졌었더라면 기하학적인 구성도

-이것이 없이는 사진은 형태도 생명도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하나를 고정시킬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구성은 분명 우리의 끊임없는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순간에는 그것은 단지 우리의 직관에서만 생겨나올 수 있다.

그 까닭은 우리로서는 일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려 애쓰는데,

연관되어 있는 모든 상호관계는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분할을 적용해 보자면, 사진작가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콤파스란 자신의 두 눈뿐이다.

어떠한 기하학적 분석이나, 사진을 하나의 구도로 축소시켜 보려는 어떠한 작업도

(사진 자체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사진이 현상 인화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럴 때 황금분할이란 사진의 사후검시를 위해 이용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파인더 위쪽에 고정시켜 놓을 조그마한 구도판을 사진기 상회에서 파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또 우리의 초점유리판 위에 황금분할의 금이 결코 새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에 당신이 잘 만들어진 사진을 잘라내거나 가린다면

그것은 기하학적으로 정확한 상호비례작용에 대한 사형선고를 의미하는 짓이다.

약점투성이의 구성을 지닌 사진이 암실의 확대기 아래에서 재구성되어 구제되는 경우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재구성했을 때는 이미 시각의 성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 각도에 관해서는 이야기할 바가 많다.

그러나 유일하게 존재하는 적절한 각도는 구성의 기하학적 각도일 뿐이지

어떤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 배를 깔고 납작하게 엎드린다거나

다른 괴상한 짓을 행하는 사진작가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각도들이 아니다.




색채

구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제껏 우리는 검은 색이라는 상징적인 색채와의 관련에만 입각하여 생각해 보았다.

흑백사진은 하나의 변형, 다시 말하면 하나의 추상이다. 거기서 모든 가치는 전이되고,

또 이것은 선택의 여지를 남긴다.


칼라사진은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많은 문제들을 수반하고 있다.

그 중 어떤 문제는 칼라사진의 복잡성과 상대적인 미숙함으로 말미암아 예측하기조차 어려운 것들이다.

요즘에도 칼라필름의 감광도는 여전히 매우 느리다.

결과적으로 칼라필름을 사용하는 사진작가는 정적인 대상에 자신의 범위를 한정시키거나,

혹은 그렇지 않으면 강렬한 인공조명을 마구 사용하는 경향을 갖고있다.

또 칼라필름의 느린 감광도 때문에 비교적 근접한 거리에 있는 것을 촬영할 때는 초점심도가 얕아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제약으루 말미암아 구성이 엉성해지는 경우가 흔하다.

뿐만 아니라 칼라사진에서의 흐릿한 배경은 확실히 유쾌하지 못한 것이다.

슬라이드로 나오는 칼라사진은 때로는 썩 괜찮아 보인다.

그런데 그 경우에는 제판공이 일을 떠 맡는다.

따라서 제판공의 사진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석판 인쇄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바람직한 것이라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잉크와 종이가 있는데 이것들은 둘 다 모두 변덕스럽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다.

잡지나 반 半호화장정본에 실린 칼라사진은 때로는 아주 서투르게 제작된 해부학적 절개도 切開圖와 같은 인상을 준다.

칼라사진인쇄가 이미 원래의 사진과 거의 다름없이 충실하게 인쇄될 수 있게 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인쇄된 색채가 실생활의 색채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아직 칼라사진술의 초창기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문제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말자거나

혹은-그것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재능까지 함께 포장된- 완전한 칼라필름이 우리의 수중에 들어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갈 길을 자각하고자 힘써야 한다.


기록사진에 있어서 칼라사진이 어떻게 발전해 나갈 것인가를 정확하게 예견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새로운 마음의 자세, 그리고 흑백사진에 적합한 것과는 다른 접근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분명한 듯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복잡한 새로운 요소가

흑백사진에 의해 종종 포착되는 삶의 움직임과 성취감을 손상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품고 있다.

칼라사진의 분야에서 진정으로 창조활동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색채를 변화시키고 조절할 수 있어야만 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인상파 화가들이 규범화시켰고,

사진작가들도 피할 수 없는 법칙들의 테두리 내에서 표현의 자유를 성취해야만 한다.


(예를 들면 동시적 대비의 법칙: 모든 색은 인접한 공간을 보색으로 물들인다는 법칙,

두 보색이 나란히 놓이면 서로를 강조하게 되지만 함께 섞이면 서로를 소멸시켜 버린다는 법칙 등 등)

자연공간 속의 색채를 종이 표면 위에 옮겨놓는 작업은 매우 복잡한 일련의 문제들을 제기한다.

눈으로 보면 어떤 색채는 두드러져 보이고 다른 어떤 색채는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색채들 상호간의 관계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공간의 깊이 속에 스스로 자리잡고 있는 색채는

평면 -그것이 그림의 표면이든 사진의 표면이든간에- 에서는 다른 배치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냅사진을 찍을 때 생기는 어려움은 바로 우리가 대상의 움직임을 조절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 칼라사진에 있어서의 진정한 어려움은 대상에 내재하는 색채들간의 상호관계를 조절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에 관련된 어려운 문제들의 항목을 불려 나가는 것은 하등 어려울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술의 진보가 그 기술의 진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기술

화학과 광학 光學에 있어서의 끊임없는 새로운 발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행동영역은 상당히 확대되고 있다.

그 발견들을 우리의 기법에 적용하고 개선하는 일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기술의 문제에는 이제껏 만연되어온 많은 미신들이 있다.

기술이란 단지 본 것을 전달하기 위해 당신이 그것에 숙달하는 한에 있어서만 중요한 것이다.

당신 개인만의 기법은 당신의 비전이 필름 위에서 효과적인것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만 창출되고 적용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다만 결과만이 중요할 따름이며 최종적인 증거자료는 완성된 사진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진작가들이 가까스로 만든 -그러나 향수에 어린 눈에 비친 단순한 추억에 지나지 않는- 사진들에 대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의 수는 한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사진보도업이 존재하게 된 것은 고작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사업이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은

쉽사리 다룰 수 있는 카메라와 더 밝은 렌즈, 그리고 영화산업 덕분에 만덜어진,

입자가 곱고 감도가 빠른 필름 같은 것들의 발전에 힘입은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카메라는 연장이지 조그만 장난감 기계가 아니다.

기계를 정교하게 다루는 것에는 아마도 매일 반복되는 도로(徒勞:헛수고)의 짜증스러움과 불확실성에 대한

무의식적인 보상작용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기법에 관해서는 지나치리 만큼 많이 생각하지만 보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다.

사진작가가 자기의 카메라를 다루기 쉬운 것으로 느끼기만 하면,

그리고 그가 하고자 하는 작업에 그 카메라가 적합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카메라의 실제적인 조작, 조리개 조절, 노출속도 조절, 그 밖의 여러가지 조작들은

자동차의 기어를 변속시키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것이 아무리 복잡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조작의 세부적 방법이나 세련되게 다루는 방법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내 몫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제작회사에서 카메라와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오렌지색의 멋진 케이스와 함께 주는 설명서 속에

매우 자세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예쁘장한 기계이긴 하지만 적어도 우리들의 대화에서는 그 단계 이상의 것들에 대해서 논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암실에서 훌륭한 사진을 왜,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말이 적용된다.

사진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사진이 찍힌 당시의 가치와 분위기를 재창조하는 일이다.

촬영하는 순간의 사진작가의 의도와 일치하도록 사진의 톤을 조절하는 일도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눈이 빛과 그림자 사이에 끊임없이 세우는 균형을 재수립하는 작업 또한 필수적이다.

사진의 마지막 창조행위가 암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사진기술에 대해서 갖는 생각에 항상 흥미를 느낀다.

이 생각은 선명한 영상을 추구하는, 좀처럼 충족되지 않는 갈망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강박적인 정념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이러한 ‘착시’의 기법에 의해서

근사한 현실을 포착하기에 이르기를 바래서인가. 어떤 경우이든 그들은 진정한 문제점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을 ‘예술적’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사진에 고의적으로 흐릿한 효과를 주곤 했던 이전 세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고객

카메라는 우리에게 일종의 시작적인 연대기를 작성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내게 있어 카메라는 내 일기이다. 바쁘게 돌아가고 불화를 일으키기 쉬운 편견들로 가득 차 있을뿐만 아니라

정보에 굶주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영상의 동반을 필요로 하는 이 세상에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우리 보도사진가들이다.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우리 사진작가들은 필경 우리가 보는것에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그것은 엄청난 책임을 내포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술가로서 날것 그대로의 재료를 사진잡지들에게 건네 주기 때문에 인쇄에 의존하게 된다.

처음으로 사진을 팔았던 일은 나로서는 정말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프랑스잡지 “Vu”였다.)

그것은 잡지와의 긴 관계의 시작이었다. 잡지는 우리에게 대중을 안내해 주었고 대중들에겐 우리를 소개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진작가가 의도했던 그대로 픽처스토리를 만들어낼 줄 안다.

그러나 때로는 불행하게도 그것을 왜곡하는 수도 있다.

잡지는 사진작가가 보여주려 했던 것을 정확하게 발행해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사진작가가 잡지의 취향이나 요구에 따라서 스스로를 맞춰나가게 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기도 한다.

픽처스토리에서 설명문은 문맥을 통해 사진들을 포용해야 하고

카메라로 미칠 수 있는 능력밖에 있었음 직한 모든 관련사항들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불행히도 가편집 과정에서 단순한 철자나 단어 착오가 아닌 실수들이 생긴다.

때로는 독자들도 그 실수를 사진작가의 책임으로 여긴다. 이런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는 것들이다.

사진들은 편집자와 레이아웃 담당자의 손을 거치게 된다.

편집자는 픽처스토리를 구성하는 평균 삼십 장 정도의 사진을 놓고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

(어느정도 그것은 일련의 인용구들을 발췌하기 위해 텍스트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는것과도 같다.)

소설처럼 픽처스토리에도 어떤 정해진 형식들이 있다.

편집자가 골라 뽑은 사진들은 그것이 불러일으킬 것으로 여겨지는 관심도나 지면사정에 따라서

둘이나 셋, 혹은 네 페이지의 지면 안에 배열되게 된다.

레이아웃 담당자의 훌륭한 재능은 그 사진들에서 한 페이지, 혹은 두 페이지를 차지할 만한 특출한 사진을 골라내고

또 이야기 전개의 필연적인 연결부 역할을 하는 작은 사진을 어디에 끼워 넣을 것인가 하는 것들을 알아내는 데 있다.

(픽처스토리용의 사진을 찍을 때 사진작가는 그 사진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배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때로 레이아웃 담당자는 사진을 잘라서 가장 중요한 부분만을 사용해야 하기도 한다.

그 까닭은 그에게는 페이지 전체, 혹은 이야기 전체의 통일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모든 내용을 살리면서 자신의 작품을 멋지게 연출해 주는 레이아웃 담당자의 작업,

즉 사진들이 정확한 위치에 놓이고,

각각의 페이지가 그 자체의 리듬과 구성을 갖게 되는 배열작업에 대해서 사진작가는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 할 것이다.


사진작가의 세번째 괴로움은 잡지에서 자신의 사진을 찾아볼 때이다.

잡지에 게재하는 것 이외에도 우리의 사진들을 유포시키는 다른 방법들이 있다.

예를 들면 전시회 그리고 거의 영구적인 전시회라 할 만한 사진집이 있다.

나는 오직 한 종류의 사진에 대해서만 꽤 길게 이야기해 왔다.

사진에는 이밖에도 많은 종류가 있다. 작은 가방 뒷면에 붙어 있는 희미한 스냅사진,

보기 좋은 선전용 카탈로그, 그 안에 배열되어 있는 물건들의 사진, 이런 것들도 틀림없는 사진이다.

나는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사진의 정의를 내리고자 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나에게 있어서의 사진의 정의를 시도할 따름이다.

나에게 있어 사진이란, 한 사건의 의미와 그 사건에 독특한 표현을 주는 형태의 정확한 구성에 대한,

짧은 순간에 있어서의 동시적 인식이다.



삶에 있어서 자아의 발견은 우리를 정형화하고,

또 우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 주위 세계의 발견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에는 어떤 균형이 수립되어져야 한다.

끊임없는 상호과정의 결과로 그 두 세계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전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진의 내용하고만 관계가 있다.

내게 있어 내용과 형식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형식이라는 용어로 나는 면, 선 그리고 가치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엄격한 구성을 의미하고자 한다.

우리의 지각과 감정들은 오직 이 구성 속에서만 구체적이고 소통 가능한 것이 된다.




사진에 있어서 시각적인 구성은 오직 훌륭한 직관으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다.

 

이상이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사진집, '결정적 순간"의 서문입니다.

중간 중간 볼드처리 한 곳은 제가 나름대로 많은 생각과 크나큰 공감을 한 부분이라 보아주시면 되고요.

 

그가 사진을 찍었던 때와 지금은 환경도 다르고 기술도 발달했으며 심지어는 사진을 보는 방법 그 자체가 크게 변했습니다.

또한 그가 자신의 테마로 삼았던 분야는 르뽀이며 그렇기에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우리가 받아 들여야 할 필요는 절대로 없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문 근간에 깔린 그의 철학, 생각, 사고, 주관은 일개 아마추어인 저에게조차 적지 않은 가르침을 줍니다.

다른 포스팅에서도 논했던 적이 있지만...이름난 작가, 인정받는 고수의 말이라 해서 100%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절대적 진리라 여겨서는 안됩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생각하고, 사고해서 자기만의 사진, 자신만의 정의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배움일테니까요.

 

위대했던 선인의 발자취에 경의를 표하며...때움포스팅을 마무리합니다. (.........어이;;)